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칠리아 왕국 (문단 편집) === [[호엔슈타우펜 왕조]] === [[파일:hohenstaufen_italy_by_hillfighter-d38a6nc.png]] [[파일:Castel_del_Monte_BW_2016-10-14_12-26-11_r.jpg]] 프리드리히 2세(시칠리아 국왕으로는 페데리코 1세)가 아풀리아에 세운 가스텔 델 몬테 성채.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 왕국을 손에 넣으면서 독일, 네덜란드, 남이탈리아, 시칠리아, 북이탈리아 일부 지역을 아우르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가 되었다. 그는 여세를 몰아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세습하는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공작을 벌였지만, 교황과 교황파 제후들의 강력한 반발로 실패했다. 이후 [[독일왕]]에 아들을 앉히고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에 착수했으나 1197년 9월 28일 [[말라리아]]에 걸려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당시 팔레르모 궁정에서 아들을 양육하며 조용히 지내던 쿠스탄차는 남편이 죽자 여왕 '''[[쿠스탄차 1세]]'''로서 통치를 행사했다. 그녀는 남편의 독일인 동료들을 궁정에서 몰아내고 시칠리아인들로 대체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제관을 지키기 위해 아들 프리드리히를 독일로 보내야 한다는 주장을 단호히 물리쳤다. 1198년 5월에는 이제 갓 세살 된 아들을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얼마 후 중병에 걸려 죽을 날이 머지 않았다는 게 분명해지자, 그녀는 아들이 성장할 때까지 왕국을 통치하고 후견인이 되어줄 역할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맡긴 뒤 1198년 11월 27일에 사망했다. 1201년, 브리엔의 발터 3세는 [[탕크레드]]의 딸 엘비라와 결혼한 뒤 아내를 내세워 시칠리아 왕이 되고자 교황에게 [[십자군]]에 참여할 테니 자신을 시칠리아 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프리드리히 2세의 후견인을 맡았는데 그런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다며 거절했지만, 타란토 공국과 레체 백국에 대한 발터 3세와 엘비라 부부의 권리를 인정했다. 발터는 일단 교황의 뜻에 동의하고 1201년 늦은 봄에 남부 이탈리아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 골몰했다. 1202년 시칠리아 왕국의 권신 팔레리아의 발터와 보부르크의 [[디에폴트]]가 이끄는 시칠리아군이 이에 맞섰으나 카푸아와 칸나이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보부르크의 디에폴트가 전열을 정비해 계속 맞서자 점차 수세에 몰리다 1205년 6월 진영에 잠입한 적 병사에게 살해되었다. 1206년, 디에폴트는 어린 프리드리히를 경비하고 있던 카파로네의 빌헬름을 설득해 프리드리히를 팔레리아의 발터에게 넘기게 했다. 이후 디에폴트와 발터는 서로 힘을 합쳐 팔레르모 왕궁을 장악하고 있던 빌헬름을 추방했다. 그러나 디에폴트와 발터는 곧 권력 분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1207년 권력다툼에서 패배한 디에폴트는 감옥에 갇혔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후 살레르노로 도망친 후 카파로네의 빌헬름과 팔레아리아의 발터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 결과 빌헬름과 발터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그들을 몰아낸 후 시칠리아의 섭정으로 군림했다. 1209년 2월, 디에폴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로부터 "마기스테르 카피타네우스 토티우스 아풀리에 에트 테레 라보리스(magister capitaneus totius Apuliae et Terre laboris: 아풀리아와 테레의 대리인)"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이후 오토 4세의 지지자를 자처했으나, 1218년 제위를 오토 4세로부터 되찾은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체포되어 독일로 끌려가 옥고를 치르다가 1221년에서야 풀려난 후 [[튜튼 기사단]]에 들어갔다. 프리드리히 2세는 실권을 잡은 뒤 시칠리아를 본거지로 삼고 그 곳의 인력과 자본을 기반삼아 오토 4세에게 빼앗겼던 황제 직위를 탈환하고 독일에서 호엔촐레른 왕조의 영향력을 회복시키는 데 골몰했다. 또한 제6차 십자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해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카밀]]과 협상해 예루살렘을 일시적이나마 기독교 세력의 손아귀에 들게 했다. 또한 이탈리아의 패권을 확보하기 위해 지속적인 원정과 모략을 벌였다. 그는 평생 독일에 발을 별로 들이지 않았고, 생애 대부분을 시칠리아에서 살았고 스스로도 시칠리아에 애착을 품었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보다는 시칠리아 국왕에 가까웠다. 어린 시절부터 시칠리아의 그리스인, 무슬림들과 허물없이 지내고 그들의 고급문화를 습득하여 시칠리아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자신 대신 독일을 다스리던 아들 [[하인리히 7세(독일)|하인리히 7세]]와 지나치게 갈등을 벌이다가 아들이 끝내 반란을 일으키자 체포한 뒤 죽을 때까지 유폐시키는 비정한 면모를 보였고, 교황청과 오랜 세월 갈등을 벌이고 모략을 일삼아 교황청과 친 교황파 세력의 반감을 샀다. 그러던 1250년 12월 12일, 프리드리히 2세는 사냥을 마친 후 고열에 시달리다 시칠리아의 카스텔 피오렌티노에서 사망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죽기 전에 아들 '''[[콘라트 4세]]'''가 자신의 영지를 물려받되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는 [[사생아]]인 [[만프레디]]가 타란토 공작으로서 대리 통치하게 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에 악감정을 품고 있던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프리드리히 2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남부 이탈리아 귀족들을 부추겨 시칠리아 왕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하지만 만프레디는 곧바로 왕실군을 이끌고 토벌에 착수해 나폴리를 제외한 수많은 반란시들을 제압했다. 이후 나폴리를 상대로 공성전을 벌이면서 인노첸시오 4세와 화해를 시도했지만, 교황이 응하지 않아 실패했다. 그러던 1252년 남부 이탈리아에 찾아온 콘라트 4세는 시칠리아 왕국의 모든 권한을 도로 가져가고 만프레디는 타란토 공국만 다스리게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어린 아들 '''[[콘라딘]]'''을 시칠리아 왕으로 선임하고, 교황에게 콘라딘을 보필해달라고 부탁했으며, 콘라딘의 섭정으로 호엔베르크의 베르톨트 후작을 임명했다. 1254년 5월, 콘라트 4세가 26세의 나이에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만프레디는 인노첸시오 4세에게 시칠리아를 넘겨주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호엔베르크의 베르톨트가 섭정을 맡는 것 역시 거부하고 자신이 섭정을 맡았다. 이에 인노첸시오 4세는 그해 7월 만프레디를 [[파문]]했다. 만프레디는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 용서를 구하면서, 교황의 특사가 남부 아틸리아에서 교황을 대신해서 교회의 입장을 전달하는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교황 수행원들이 오만하게 굴자 반감을 품고 루체라에 거주하는 아랍인들과 손을 잡고 교황청에 대항했다. 1254년 11월 인노첸시오 4세가 나폴리에 입성하여 전쟁을 선도하자, 그는 포자로 진군해 12월 2일 교황의 조카 굴리에모 피에스키 추기경이 이끄는 교황군을 섬멸했다. 이 소식을 접한 교황은 큰 충격을 받고 1254년 12월 7일 나폴리에서 선종했다. 이후 만프레디는 투스카니 지방, 특히 시에나의 기벨린(친 황제파) 파벌에 독일 기사단을 지원해, 그들이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구엘프(친 교황파) 파벌이 지배하는 피렌체를 격파하는 데 기여헀다. 인노첸시오 4세의 뒤를 이어 새 교황이 된 [[알렉산데르 4세]]가 만프레디를 또다시 파문하자, 남부 이탈리아 각지에서 친 교황 세력이 준동했다. 하지만 1257년에 모든 반란이 제압되었고, 알렉산데르 4세는 만프레디의 후원을 받은 기벨린 세력의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로마에서 비테르보로 피신했다. 1258년 콘라딘이 사망했다는 소문이 돌자, 만프레디는 그해 8월 10일 시칠리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나중에 콘라딘이 파견한 사절들이 콘라딘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전했지만, 만프레디는 강력한 왕이 시칠리아를 다스려야 한다는 민중의 호소를 빌미삼아 퇴위를 거부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아랍인들과 손잡은 만프레디를 [[적그리스도]]라고 칭하며 주변 국가들에 십자군을 일으켜달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만프레디는 입지를 강화하고자 마침 기벨린 파벌의 지도자 에셀리노 3세 다 로마노가 사망하자 대리자의 자격으로 토스카나, 스폴레토, 마르체, 로마냐, 롬바르디의 시장을 지명했으며, 피렌체 시민들에 의해 토스카나의 수호자이자 로마인의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262년에는 자신의 딸 [[쿠스탄차 2세|쿠스탄차]]를 아라곤 왕 페드로 3세와 결혼시킴으로써 입지를 더욱 강화했다. 1261년 선종한 알렉산데르 4세의 뒤를 이어 교황에 오른 [[우르바노 4세]]는 만프레디를 세번째로 파문한 뒤 1263년 영국의 [[헨리 3세]]와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형제인 앙주의 [[카를루 1세|샤를 1세]]에게 시칠리아 국왕으로 인정해줄 테니 만프레디를 토벌해달라고 청했다. 이중 샤를이 교황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고 3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이 소식을 접한 만프레디는 로마에 선언서를 보내 자신이 왕국을 통치할 권한이 있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권리도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샤를에 맞서기 위해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1265년 하반기에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수많은 기벨린 요새들을 공략한 샤를은 1266년 1월 로마에 입성하여 기벨린파를 몰아낸 뒤 1월 20일 시칠리아 왕국의 영역인 남부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1266년 2월 26일, 샤를의 프랑스군과 만프레디의 시칠리아군이 베네벤토에서 격돌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부하들은 일단 몸을 피해 후일을 도모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도망치기를 거부하고 적에게 돌진하다가 전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